“십자가를 만나야 깨진다.”(2020.8.7.금.전병욱 컬럼)
자기 사랑이 모든 우상숭배의 출발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든다. (신5:8)
때를 가리지 않고 나를 거룩하게 보이려고 애쓴다. 심지어 기도도 타락할 수 있다.
공중 기도를 들어보라. “맞는 말, 옳은 말, 좋은 말, 신앙있는 말”이 넘쳐난다.
기도조차 나를 포장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힘이 생긴다. 그 힘을 자기를 포장하는데 사용한다.
“감상주의”는 자기 사랑에서 나온다.
지나치게 눈물, 감동을 자아내는 사람을 조심하라.
에고가 강해서 그렇다. 나중에 자기 뜻대로 안되면, 그런 사람은 “폭력적”이 된다.
히틀러는 기르던 새가 죽었을 때, 3일동안 식음 전폐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기 뜻에 안 맞는다고 유대인 600만을 학살한다.
지나친 감상주의는 곧 폭력으로 변화된다. 왜? 모든 것이 다 나를 포장하기 위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건강하지 않으면 싸움을 피한다. 왜? 사실이 드러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멋지게 보이려는 “쇼윈도 부부”는 싸우지 않는다.
가짜이기 때문이다. 반면 건강한 부부는 싸운다.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싸운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는 게 맞나?
하나님이 이따위로 세상을 통치해도 되는건가?”(창18:25) 모세도 하나님과 싸운다.
“내가 무슨 힘으로 백성에게 고기를 주겠는가? 이제 더 이상 못해 먹겠다. 나를 죽여 달라.”(민11:13-15)
진짜 신앙이기에 싸울 수 있었다. 왜?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을 만나는 게 너무 아프다. 그래서 가짜 나를 만든다. 그게 에고다.
에고는 모든 걸 “비틀어 버린다.”(twisting) 세상 모두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모두가 내게 환호하지 않는다. 모든 걸 내가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같이 말한다.
얻을 수 없는 포도를 “저 포도는 신포도야”라고 비틀어 버린다.
왜? 사실과 만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자꾸 나를 감춘다. 현실도피한다. 사실을 외면한다.
그래서 진짜 나를 드러내지 못하고, 가짜로 산다. 가짜로 나가니,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
“구스인이 피부를, 표범이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다. 에고에 사로잡힌 사람도 그렇다.”(렘13:23)
가짜로 살면, 사람은 변화되지 않는다. 결코 새로워질 수 없다.
그럼 새로워지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뿐이다. 나도 만나고 싶지 않은 나가 있다.
나는 “나의 죄, 거짓, 음란, 비겁, 욕망, 수치, 저주”를 회피한다. 근데 예수님은 이걸 만나주신다.
심지어 “자기 것으로 품어 주신다.” 나도 만나고 싶지 않은 나를 만난다. 나도 품지 못하는 걸 품는다.
이때에만 나의 에고의 껍질에 금이 간다. 생명이 그 틈 사이로 들어온다. 나중에는 에고가 완전히 깨진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십자가 없이는 새로워질 수 없다. 십자가 없이는 깨지지 않는다.
교회는 계속 십자가의 예수를 증거해야 한다. 그래야 가짜가 깨지고, 진짜가 생명을 만난다.
진짜 생명을 만나면 변한다. 완전히 변화된다. 이건 100% 진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라. 그리고 깨지라.
그러면 변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게 복음이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