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결코 강요로 생기는 게 아니다.”(2018.4.12.목.전병욱 컬럼)
 
    진짜 예배 이후 벌어지는 현상은? 허기와 자발성이다.
 
1. 허기와 갈증(hunger and thirst)
 
  임재가 있는 예배를 드리면 부족함이 “채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는 허기를 느낀다. 목마름을 느낀다.
유진 피터슨은 말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허기를 채우지 못한다.
오히려 식욕을 자극한다. 목마름을 자극한다.
갈증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갈증이 깊어진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던 모세다.
하나님이 소원을 말하라고 묻는다.
또 다른 축복과 고난극복을 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근데 실제는 사뭇 다르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33:18)
하나님에 대한 더한 갈증이 생겼다는 말이다.
16강 원하던 월드컵에서 8강, 4강까지 갔다. 만족했나?
히딩크는 말했다. “아직도 배고프다.”(I am still hungry.)
만족이 아니다. 더한 배고픔이 온다는 것이다.
 
  예배의 맛을 모르면 엉뚱한 것 추구한다.
대체 영광인 자기 자신이다. “소비자주의”(consumerism)가 그것이다.
과거에는 “섬길 교회”를 찾는다 했다. 말이라도 멋지다.
지금은 교회 쇼핑한다. 소비자 태도로 찾아 헤맨다.
위로 받고, 격려 받고, 인정받고, 지식 배우고, 필요를 채울 곳을 찾는다.
항상 뭘 얻을까만 생각한다. 사명이 뭔지 모른다.
의인이란 자신의 “영향권” 밑에 있는 사람을 책임지는 자임을 망각한다.
채워지지 않는 헛됨을 추구한다.
채워져도 허망한 무가치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 밖에 안보인다.
나 무엇과도 주님과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더 집중, 더 헌신, 더 충성한다. 오직 하나님 뿐이다.
 
2. 자발성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이 구절의 뜻도 잘 모른다. 진리가 뭐냐? 예수님 또는 말씀이다.
자유는 자발성이다. 말씀에 붙들린 사람은 자발성으로 산다는 말이다.
해야할 일을 한다. 가야할 길을 간다. 억지가 아니다.
모든 풍성함을 포기하고 인도 비하르로 간 선교사님이 있다.
억지가 아니다. 스스로 원해서 간 것이다.
물론 “불편”하다. 그러나 “불행”하지 않다.
사명의 길이다. 자유의 길이다. 그래서 행복하다.
 
  얼마전 팀 켈러가 왔다.
“포스트모던 시대, 복음 전하는 7가지 방법”을 강의했다.
5번째가 인상적이다. “신앙은 절대 강요로 생기는 게 아니다.”
예배가 죽으면 자발성, 자유가 뭔지 모른다.
오직 억지로 하는 일 밖에 모른다. 그러니 기쁨이 없다.
힘들다. 억지다. 지친다. 나가 떨어진다. 이게 무슨 신앙인가?
 
  니체는 자유에 대한 엉뚱한 정의를 내렸다.
“자유란 나를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이다.”
일면 맞기도 하다.
IFC 몰에서 아는 사람 4명을 만났다. 싫었다. 불편했다.
반면 인도 비하르 시골에 가 있으니 아는 사람 없었다.
관여하는 사람, 간섭하는 눈도 없었다. 편하다. 근데 그게 자유냐?
십여년전 유학생 집회를 자주했다. 그들은 자유를 만끽하는 듯 보였다.
부모도 없다. 아는 사람도 없다. 아무하고나 동거해도 된다. 여
행도 만끽한다. 그러나 그건 자유가 아니었다.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진정한 자유는 오히려 아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자유를 느낀다.
부모를 사랑한다. 부모와 있을 때 자유롭다. 아내를 사랑한다.
같이 있을 때 자유롭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같이 있을 때 자유롭다. 진짜 예배는 함께 하는 자발성이 일어난다.
능히 십자가도 질 수 있는 자발적 뜨거움이 일어난다.
 
  예배가 뭐냐? 구원에 대한 뜨거운 반응이다.
진짜 예배는 뜨거움, 감격을 준다. 결단이 나온다.
헌신이 나온다. 죽을 수 있다. 고난도 보이지 않는다.
감격과 눈물, 뜨거움이 인생을 지배한다.
진짜 예배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진짜 예배가 뭔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10년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억지가 아니다. 강요가 아니다.
타는 목마름과 자발성은 예배에서 나온다.
예배 없는 시도는 단순 발악일 뿐이다.
소모전 그만하고, 솟아나는 샘물을 체험하라.
예배가 그 답이다.


전병욱 목사 컬럼

전병욱 목사 컬럼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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